정보 [전쟁이야기] 역사속 라이벌 03 - 이성계 vs 최영
'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것이다.'
‐최영
1. 헬조선의 원조격 헬고려
<고려말 왜구의 고려침공 모식도.>
동서남북 안털린곳이 없고, 강화도는 물론이고 개경까지 털렸어. 공민왕과 우왕 두 왕의 집권기에만 800번이 넘는 크고작은 침공이 있었다고 전해져.
때는 고려말, 동북아시아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힘이 빠지면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만주 여진족의 약탈과
왜구의 대대적인 침입, 원나라와 신흥 국가 명나라의 대립까지 이어지며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중국과 일본사이에 낀 고려는 위로는 여진침입 + 홍건적침입 + 원나라의 삥뜯기에 , 아래로는 왜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쳐들어와서 나라가 정말 개판이였어.
임진왜란때도 지방의 세곡을 수도로 수송하는 조운선만큼은 털리지 않았는데, 고려 말엔 조운선도 털릴만큼 왜구의 수준은 단순한 해적 그 이상이였어.
얘들은 중국 강남과 동남아시아까지 가서 약탈했고, 전성기때는 고려수군의 군함이 100척이였을때 왜구는 500척을 끌고 왔다하니 그 규모역시 엄청났어.
거기에 나라가 워낙에 개판이다 보니 국내에서 큰 반란들이 계속 터져나왔고, 세기말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계속되니, 백성들의 삶, 특히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남지방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어.
[... 왜구들이 내륙까지 진출하여 여러 군현들을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마구 죽여대니 지금 삼남지방에는 풀만 무성하여 집터는 드문드문 보이옵니다만, 백성들은 모두 죽거나 흩어져 보이지 않습니다.. ]
[... 일부 관리들이 지나친 횡포를 부리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조정의 관리들에게 시달리느니 왜구에게 죽는것이 낫다 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하옵니다... ]
헬조선은 명함도 못내밀 수준인 헬고려가 용캐 망하지 않고 버텨낸것은, 전적으로 두 인물의 공이 컸어.
2. 최영의 등장
하늘이 고려를 당장은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원간섭기로 한창 나라가 무너져갈때 고려말 가장 위대한 왕이라 평가받는 공민왕이 등장해.
이때 최영도 거의 비슷하게 등장하는데, 30후반의 나이에 부관 신분으로 수없이 많은 왜구들을 막아내.
이후 조일신의 난까지 진압하며 공민왕의 총애를 받게 되고, 원나라에도 다녀오며 그곳에서 보고 들은것을 바탕으로 공민왕에게 원나라의 시대도 저물었다고 간언함으로서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의 시작에 큰 기여를 해.
반원 자주정책의 일환으로 최영은 압록강 근처의 원나라 세력들을 다 때려잡았고, 쉴새도 없이 곧바로 수군을 통솔해 오예포에서 왜구들을 섬멸해.
수백차례의 왜구침입을 최영이 막아내자 공민왕은 최영을 동북 서북 왜구방어 책임자로 임명했는데,
최영을 빼면 딱히 쓸 인재가 없어서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방어까지 결국 최영의 몫이 돼.
최영은 무너지는 나라를 말그대로 혼자 온몸으로 받아낸거야.
원나라에 반란에 왜구도 모자라서 1360년, 4만명의 홍건적이 한반도에 침입해 서경이 함락돼.
여기에 또다시 최영이 투입되어 서경을 재탈환하고 홍건적을 모조리 섬멸해.
이 공로로 최영은 서북쪽 국경책임자가 되는데, 그때까지 겸하고 있던 관직까지 합치면 동서남북 육해 사실상 거의 모든 국경을 최영이 관리하게 된거야.
1년뒤, 이번에는 10만명의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몽진을 준비하는 등 정말로 고려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
이때 또 한명의 영웅이 등장해.
3.이성계의 등장
'화살이 과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활 쏘는 이가 과녁으로 화살을 보내야 한다.'
‐이성계
'겁나는 사람은 물러나라! 나는 적들에게 죽을 것이다!'
‐이성계
원나라의 장교였다가 최영을 필두로 한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때 내응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순한 이성계는 1361년 박의의 반란을 제압하는 것을 기점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해.
같은해 10만 홍건적의 2차침입으로 북쪽의 삼주가 함락되고 개경마저 함락되자, 2천명의 개인 사병들을 이끌고 개경에 선봉으로 진격해 홍건적 두목을 활로 쏴죽이며 개경을 다시 탈환하는 등 사기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줘.
다음해인 1362년 원나라의 네임드 장수 나하추가 1만의 군대를 끌고 고려를 침공하자 이성계가 총사령관이 되어 격전끝에 나하추를 역관광보내.
[ 공(나하추)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지만 저런 장수(이성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서 피하여 속히 돌아오십시오.] ‐ 나하추의 부인
[ 공민왕이 이성계를 보내어 거의 죽을 뻔 했소.
그는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신과 같으니, 장차 큰 일을 해낼것이오. ] ‐ 나하추
1364년 또다시 일어난 반란을 최영과 함께 진압하고,
같은 해 여진족들이 북방을 어지럽히자 이들을 모두 궤멸시켰어.
최영과 이성계는 반년~1년 단위로 고려 전국을 함께 누비며 사방에서 침입하는 외적들을 막아내어 고려 백성들의 슈퍼영웅으로 등극해.
4. 1차 요동정벌
1368년, 원나라는 점차 명나라에 밀리며 고려쪽엔 신경을 쓸수없게 되었고, 막 건국된 명나라역시 내부 원나라 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바빠서 고려쪽에 신경을 쓸수 없었어.
공민왕은 이때가 하늘이 준 기회임을 깨닫고 1만5천명의 정예병을 쥐어짜내 요동지역에 남아있는 원나라 세력을
토벌할 것을 명령해.
1370년, 이인임과 이성계를 주축으로 한 고려군은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오녀산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해.
이때 이성계의 무쌍이 돋보이는데, 적들이 험준한 산성에서 농성을 계속하자 옆에 있던 시종의 활을 빌려 70발을 쐈는데
그 70발이 모두 헤드샷으로 적중되자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적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고 해.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농성한 채 계속 저항해오므로 아군은 성을 포위했다.
마침 태조가 활이 없는지라 종자의 활로 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면상을 명중시켰다.
이에 성안에 있던 군사들은 기세가 꺾여버렸으며 고안위는 처자를 내버려둔 채 밤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도주해 버렸다....]
그해 10월, 고려 원정군은 요동성에 도착했고, 매서운 기세로 성을 공격해,
이때 처명이라는 적의 고위장수를 항복시켜 적의 사기를 바닥을 치게 만든 1등공신이 이성계였는데,
적장이지만 잘 싸우던 처명이 마음에 든 이성계의 첫 투항권고를 처명이 거절하자
이성계는 화살 3개를 뽑아 첫발은 처명의 투구, 두번째 발은 허벅다리를 맞췄고 막발을 겨눈 상태로
"이번엔 너의 머리를 맞출 차례다"
라고 하자 질려버린 처명이 그 자리에서 낙마하여 항복했다고 해.
결국 고려는 발해가 멸망한지 256년만에 한민족의 염원이였던 요동을 수복하는데 성공해.
하지만 공격과정에서 성의 군량창고가 불타버리는 사고가 터져.
보급로가 확실하지 못했던 고려군은 결국 전사한 장병들보다 굶어죽은 병사들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됐고, 결국 힘들게 얻은 요동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
결국 요동을 버리고 귀국하기로 결정해.
이때 공민왕과 이성계, 최영, 이인임등 여러 관리들은 이렇게 좋은 때가 다시 찾아오기 힘듦을 알았기에 땅을 치며 아쉬워해.
한국사 속 한민족의 마지막 요동 점유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순간이였어.
이렇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렸기에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고려의 1차 요동정벌에 대해 알지조차 못해.
<700년전 한민족의 마지막 요동 점유.>
앞으로 우리나라가 중국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일으킬 확률은
0에 가깝기에, 사실상 저 땅을 영원히 되찾지 못할거야.
만약 저 땅을 무사히 지켜냈다면 한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5. 정점을 찍는 왜구의 침공
고려의 요동정벌 이후에도, 왜구들은 심심하면 쳐들어왔고 이때마다 최영, 이성계를 필두로 한 유능한 고려 무장들이 전국구로 뛰어다니며 막아내.
몇일에서 몇달 간격으로 경상도, 전라도, 강화도, 양광도, 황해도, 제주도에 침입해 교전했다 하니 이때 고려 장수들은 얼마나 개고생했을까?
하루가 멀다하고 왜구와 전쟁을 치르니 나라 재정은 결국 파탄나버려.
군함 건조비용은 커녕 3천명의 군인들에게 줄 월급조차 부족해서 군대를 확충할 수도 없는 막장상황까지 닥쳐.
[ 최영: 지금 제가 하고있는 일이 많은데 해도도통사까지 역임하긴 힘들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수군을 꾸리려고 해도 지금 전함이 100여척에
수병도 불과 3,000명 밖에 안되는데,
제대로 싸우려면 1만명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라 곳간이 비어 그러지 못하니, 심히 염려되옵니다.
우왕: 국고가 비어서 1만 명을 꾸릴 수 없다.
3천 명의 병사가 한 명이 백 명씩 대적하라.]
왕이 저렇게 할말없게 만드는 대답을 할정도로 나라는 거지꼴이였어.
이때 그 유명한 부원수 최무선이 진포에서 한국사 최초로 해전에서 함포를 이용, 100척의 배로 정박해 있던 500척의 왜선을 모두 격파해.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500척의 배에서 상륙한 왜구들이였어. 해군은 해군의 몫을 다했으니 이젠 육군을 믿는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상륙한 왜구들은 기존에 다른 지방에 있던 왜구들까지 결집시켜 무려 2만명까지 그 수가 불어나.
이들은 충청북도‐경상북도로 이동하며 경로상의 도시들을 모조리 학살시켰어.
이를 막기위해 지금으로 치면 군 장성 9명이 연합하여 내려갔으니, 얼마나 상황이 좋지 않았는지 짐작할수 있어.
그런데 9명의 원수들이 집결했음에도 오히려 2명의 원수가 전사하는 대패를 겪게 되었고, 왜구들은 의기양양하게 전라도로 이동해.
신난 왜구는 개경까지 함락시키겠다고 선포하고, 일이 커지자 고려는 이성계를 토벌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라도로 파견해.
6. 이성계 라이즈 ‐ 황산대첩
이성계는 조정에서 내어준 병력과 현장의 병사들을 합쳐 약 1만5천의 병력을 통솔했고, 1380년 9월, 마침내 황산에서 주둔하던 왜구들과 만나게 돼.
이때 재밌는 일화중 하나로 한 왜구가 언덕위에서 엉덩이를 까고 짱구댄스를 춰서 고려군을 조롱하자,
이성계가 이를 지켜보다가 가만히 화살 한대를 쏴 그대로 항문에 박아줬다고 해.
아무튼 이성계는 황산의 지형을 이용해 왜구가 절대 고려군의 뒤를 칠수 없게끔 만들었고, 그날 두 군대는 정면으로 맞붙어 대규모 난전이 펼쳐져.
총사령관 이성계와 휘하의 장군들도 그 한복판에서 백병전을 할만큼 난전이였어.
[..한 왜장이 창을 들고 태조의 뒤에서 다가갔다. 하지만 전황이 너무나도 긴박했기에 태조는 알아채지 못하였다.
이를 알아챈 장수 이지란이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 라고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마저도 듣지 못하였다.
이에 이지란은 직접 활을 쏴 그 왜장을 죽였다..]
[.. 황산의 험준한 지형에서 난전이 지속되자 병사들은 점차 지쳐갔다. 이때 태조는 주위를 둘러싸던 왜구들을 수 없이 베어넘겼는데, 겁멉은 적들은 쉽사리 다가서지 못했다.
한순간 여유가 생긴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怯者退 我且死賊)!" 라고 소리치자, 이를 들은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들이 그대로 느껴져.
고려군에 이성계가 있었다면 왜구에게는 아기발도라는 어린 장수가 고려군을 썰고 다녔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활로 저격해 아기발도를 죽이려 하였어.
하지만 아기발도는 중갑을 착용했던 터라 화살이 통하지 않았어.
이에 이성계는 옆에 있던 이지란에게 "내가 적장의 투구 꼭지를 쏠 테니, 그대가 마무리 하라." 라고 말했고 그대로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쏘아 맞췄어.
투구 끈이 끊어진 아기발도가 다시 투구를 고쳐 쓰려고 할때, 이성계는 화살을 쏘며 적을 방해하여 주의를 끌었고, 틈을 노리고 있던 이지란은 화살을 쏘아 헤드샷에 성공해.
둘다 가히 신궁이라 불려도 이상할게 없는 실력이야.
총사령관이 죽자 왜구는 순식간에 붕괴했고, 이성계는 다른 원수들과 왜구들을 포위섬멸하여 전멸시켜. 왜구 70명 정도만 살아남아 도망쳤다고 할만큼 대승이였어.
[...워낙 대살육이 벌어진 통에 인근의 냇물이 모두 피로 붉어져 6일,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그곳 주위에 살던 백성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사실상 이 승리로 왜구와 고려의 오랜 전쟁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이성계는 개경으로 귀환하는 길에 위치하던 모든 고을에서 구국의 영웅대접을 받게 돼.
[...이때 조정에서도 승리 소식을 듣고 분위기가 되어 판삼사(判三司) 최영은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백관을 이끌고 나와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태조를 맞이했다.
말을 타고 오던 태조는 최영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에서 내려 최영에게 절을 하였고, 태조의 절을 받은 최영도 맞절을 하더니 감격에 겨워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했겠소이까?"
최영의 모습을 본 태조는 황급이 고개를 숙이며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라고 대답했는데, 감정이 북받힌 최영은 오열하면서 소리쳤다.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성계가 얼마나 대단한 전공을 이뤄냈는지 실감할수 있는 대목이야.
젊을때부터 이성계 못지않게 전장에서 굴렀던 최영까지 울며 감사해했던 것을 보면..
원래에도 최영은 이성계를 아들처럼 대해주었고 사이도 좋았지만, 황산대첩 이후로는 더욱더 돈독해졌다고 해.
이성계가 야심가라고 경계해야한다고 주위에서 조언해주던 사람들까지 물리칠 정도로 최영은 이성계를 신임했어.
아마 최영은 자기가 죽을때가 되면 이성계에게 고려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려 했을거야.
그런데....
7. 2차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1388년, 몽골세력이 중원에서 사실상 멸망하자, 그 전까진 고려에 나름 잘 대해줬던 명나라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고려에 갑질을 하기 시작해.
이에 최영은 극대노하고, 우왕에게 요동정벌을 주장해.
공민왕시절 다 먹었다 뱉어버린 요동에 대한 아쉬움까지 더해졌는지, 최영은 요동정벌 반대파들을 숙청까지 하는 급발진을 하며 요동에 대한 집착을 보여.
반면 최영과 양대산맥을 이루던 실력자였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했는데,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근거로 제시해.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逆擊)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흔히들 떠올리는 사대관계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국력차이를 의미하는거야.)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공할 것입니다.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사람마다 이견의 여지는 있겠지만,
어느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였어.
실제로도 3번 4번 항목은 일어났기도 하고.
또한 당시 중국은 명나라가 원나라를 거의 완전히 밀어냈기에, 1차 요동정벌과 대외상황이 완전히 달랐어.
요동정벌은 사실상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었어.
하지만 최영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그럼 지금 말고 가을까지 준비해서 가을에 출발하자는 이성계의 절충안도 무시해버려.
최영도 뭔가 찝찝했던지 고령의 나이에 직접 사령관으로 원정군을 지휘하려 했지만, 우왕이 제발 본인 곁에 남아있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이성계를 전국에서 박박 긁어모은 5만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정하는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말아.
이후 이야기는 다들 알다시피,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도하하기 어렵고 군량까지 바닥났으니 회군을 허락해달라는 이성계의 상소가 씹히자 이성계는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강행해.
원정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최영은 몇 안되는 군사들을 끌고 몸소 반란군을 맞아 조민수의 선봉대를 격파하는 투혼을 보여주지만 끝내 이성계에게 패배하고 우왕과 함께 여기저기 유배를 보내지다가 결국 참수당해.
나라를 위해 모든걸 바친 충신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한 최후였어.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이성계
반면 이성계는 고려군마저 격파함으로서 당시 동북아시아의 모든 세력, 즉 여진, 홍건적, 왜구,원나라, 고려를 상대로 인피니티 스톤 모으듯이 한번도 지지않고 모조리 격파해 한국사 통틀어서 전무후무한 전설적인 장군이 돼.
고려의 타노스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한편 최영이 참수당할때 길거리에는 이성계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고려의 수호영웅 최영을 추모해주었다고 해.
사실상 그의 죽음과 함께 고려도 죽었다고 볼수있어.
그뒤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새 왕조 창업에 박차를 가하고, 1392년 8월 왕으로 즉위하면서 조선왕조 500년의 시작을 선포해.
새 왕조를 세우기 위해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혀서일까,
이성계는 노년에 자신의 아들 이방원에게 일평생 유일한 패배를 당하며 개국공신들의 대대적인 숙청과 자식들간에 죽고 죽이는 꼴을 지켜볼수밖에 없는, 선왕으로서도 부모로서도 가장 불행한 말년을 보내.
이로써 두 사람 모두 한평생을 무패장군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마지막 순간에 딱 한번 패배함으로서 비참한 말년을 보내는 공통점을 가지게 돼.
댓글 3
댓글 쓰기와 고려가 요동을 먹은건 첨 알았어요 ㅠㅠㅠ 맨날 고구려가 삼국통일했더라면 했는데
좀 더 찾아보면 더 재미있어지는게 '북벌'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인데. 저 시절 요동정벌의 대상은 원나라가 아니라 심양왕이라는 것. 고려는 몽골한테 항복하면서 충선왕(이지르부카)부터는 쿠빌라이의 손자로 황금씨족의 일원이 되어버리는데 그때 고려왕 외에 추가로 심양왕의 자리를 얻고 이게 고려왕실에 내려가면서 두고두고 분쟁의 씨앗이 되지. 역사를 잘 모르고 피상적으로 보면 공민왕이 뭔가 북벌에 불타는 약간 비운의 민족의 대왕같은 느낌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즉 공민왕은 예케몽골울루스 왕가의 일원인 고려왕 바얀티무르로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심양왕의 왕위를 주장하며 심양의 고려인들을 친거지 무슨반원자주정책 이런게 아니었어.
와 요동정벌1차는 충격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