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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미군과 독일군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합작전, [이터성 전투]를 알아보자. -2차 세계대전-

알렉산더
844 2 0

1940년 2월 경.

 

2차세계대전 개전 초기.

 


 

오스트리아를 합병시킨 나치 독일은 고위급 포로들을

따로 수용시킬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었어.

 

그러다 전쟁 발발 이전부터 활강스키의 명소로

각광받던 '이터' 라는 작은 마을 부근에서

 


 

관광호텔로 사용중이던 '슐로츠 이터 성' 이라는

오래된 고성을 발견할 수 있었지.

 

당시, 이 성을 마음에 들어했었던 독일 점령군은

성의 소유주였던 '프란츠 그뤼너 박사' 에게

 

상당한 비용을 지불한 후 이터 성을 임대 받아

VIP 수용소로 이용하고자 했으나

 


 

소유주의 강력한 반발로 수용소로는 사용하지

못했고 독일군 고위장교들의 숙소로만

이용되고 있었다고 해.


 

 

1943년 2월 7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이 나치 독일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아프리카와 지중해, 소련에서도

나치 독일이 밀어붙이고 있을 때 쯤,

 


 

'하인리히 히믈러' 는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군이

건물주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중이던

 

모든 시설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강제 징발하라는

명령을 독일 점령지들에게 하달했어.

 

세계의 절반을 손에 넣은 마당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시설을 빌려야할 이유가

없다는 히믈러의 생각 때문이었지.

 


            

히믈러의 지시로 인해 나치 독일에게 그동안 높은

임대료를 받고 건물을 임대해 줬던 수많은

민간인 소유주들은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SS무장친위대의 협박과

위협에 의해 빌려준 건물들의 소유권을

강제로 박탈당하고 빼앗겨야 했어.

 


 

이터 성 또한 무장친위대의 조치로 인해 강제로

징발되어 나치 독일의 소유가 되어버렸지.

 

SS무장친위대가 이터 성의 소유권을 빼앗자 그때서야

비로소 VIP 전용 수용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해.


 

 

 

1943년 5월 20일.

 


 

포로 수용소로 개조된 이터 성은 무장친위대의

관리를 받으며 프랑스에서 체포한 고위급

포로들을 수감시키기 시작했어.

 

당시, 이터 성에 수감된 VIP 명단을 살펴보자면,

 

1. 에두아르 달라디에 ( 전 프랑스 총리, 좌익정치가)

 

2. 알베르 르브룅 (전 프랑스 대통령, 우익 정치가)

 

3. 모리스 가블랭 (프랑스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

 

4. 막심 베이강 (프랑스군 원수, 최후의 사단 사령관)

 

5. 폴 레노 (프랑스 총리, 반나치 성향의 정치가)

 

6. 레옹 주오 (프랑스 노동총연맹 지도자)

 

7. 장 보로트라 (프랑스 스포츠 행정청장)

 

 

 


 

위 인물들은 모두 추후에 있을 연합국과의 교섭을

대비해 독일이 일부로 살려둔 자들이었으며

 

포로이기 이전에 중요한 협상카드로 취급되어

무장친위대에게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수용소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의식주와 수용소의 유지보수 및 잡무는

모두 동유럽 출신의 포로들을 데려와서

시키도록 했다고 해.


 

 

1945년 5월 2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소련군에게 점령당하고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이 소식은

머지않아 이터 성을 관리중이던

 

무장친위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이들은 심각한

혼란과 고민에 빠져야 했어.

 


 

무장친위대 총사령관인 히믈러는 진작에 도망쳤고

명령을 하달해줄 지휘관과 상급부대들까지

모두 공중분해가 되어버린 덕분에

 

이터 성에 고립된 무장친위대 1개 소대 병력이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했거든.

 


 

그래서 이터 성의 지휘관인 세바스찬 위버 중위는

더 이상 VIP 포로들이 협상카드로써 쓸모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고

 

머지않아 이터 성에 연합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포로들을 전부 처형하기로 결정했다고 해.

 


 

5월 3일.

 


 

이터 성의 지휘관 세바스찬 위버는 아직 이터 성

주변지역에 처지가 비슷한 잔여 독일군들이

상당수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즈보니미르 쿠코비치' 라는 포로를

전령으로 보내게 되었어.

 


 

유고 레지스탕스 출신이었던 쿠코비치는 성에서

나오자마자 위버의 지시는 팽겨쳐 버리고

 

연합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 한장만을

간직한 채 여러 마을을 지나가고 계곡을

힘겹게 거슬러 올라간 끝에

 


 

성에서 무려 64km 떨어져 있는 인스부르크

외곽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미 육군 제 103보병사단 예하 409연대의

병력과 마주칠 수 있게 되었지.

 


 

미군을 마주하게된 쿠코비치는 409연대장에게

이터 성에 고위급 포로가 다수 수감되어

있다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고

 

409연대는 사령부의 승인 하에 5월 4일 새벽에

이터 성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고 해.

 


 

한편, 쿠코비치가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올 생각을

하지않자 그가 배신하고 연합군을 끌어들이러

갔다고 생각한 이터 성의 지휘관,

 

세바스찬 위버는 두려움에 휩싸여 한밤중에

부하들과 함께 도주해 버리고 말았고

 


 

자고 일어났더니 무장친위대가 모조리 도망가버려

어리둥절해 하던 이터 성의 포로들은 그들이

버리고 간 총기들을 노획한 후

 

자체적으로 성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었어.

 


 

그러나 병력도 무기도 매우 부족한 상황인지라

체코인 요리사 '안드레아스 크로보트' 가

 

어딘가에 있을 연합군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지전거를 타고 성을 나가게 되었다고 해.


 

 

5월 4일.

 


 

쿠코비치와 접선했었던 미 육군 제 409연대는

중무장한 병력을 동원하여 이터 마을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지만

 

중간지점인 옌바흐 마을에서 잔존 독일군들의

포격을 받게되는 바람에 진격을 멈추고

현 위치를 고수할 수 밖에 없었지.

 


 

한편, 체코인 요리사 크로보트는 이터 성과 꽤 가까운

거리에 있던 뵈르글 마을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어.

 

뵈르글 마을은 독일군이 전부 철수한 상태라 안심하고

연합군의 행방을 수소문 할 수 있다고 판단되던

곳이였거든

 


 

그래서 크로포트는 조금 긴장이 풀린 상태로

뵈르글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절망스럽게도 마을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마을 주민들이나 연합군이 아닌

 


 

88mm 대공포를 포함하여 온갖 중화기로 무장한

무장친위대 1개 중대급 병력이 있었던거야.

 

이들 무장친위대는 자체적으로 무리지어 떠돌아

다니며 탈영병들을 처형하고 무고한 사람을

쏴죽이고 다니던 자들이었지.

 


 

시내 한복판에서 총기를 난사해대는 무장친위대

병사들을 본 크로포트는 당연히 ㅈ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운좋게도 독일 국방군들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해.

 

당시 크로포트를 도와준 독일 국방군은 뵈르글 마을에서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반 나치 활동을

하고있던 무리였는데

 


 

포병 장교였던 '요제프 강글 소령' 과 대략 스무명

정도의 독일군 병사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원래 이들은 뵈르글 마을에 계속 머물고 있다가

연합군이 진주해 올때 그들에게 항복한 후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전국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처형과 약탈을 일삼던

무장친위대가 뵈르글 마을에 들이닥쳐서는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기 시작하자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에게 협력하여 그들과

함께 마을주민들을 보호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찰나에

 

크로보트를 만나 그를 도와주게 된거였지.

 


 

어쨌든 무장친위대로부터 목숨을 건지게 된

크로포트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강글 소령에게 이터 성을 방어 중인 포로들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 시작했는데

 

강글은 크로포트의 부탁을 들어줄 여력이 없어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어.

 


 

왜냐하면 마침 뵈르길 마을에 있는 무장친위대가

이터 성에서 포로들이 농성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 상황인지라

 

무장친위대 전 병력이 이터 성으로 출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태였으며 중대급 병력 치고는

매우 과한 화력을 보유중이었음에도

 


 

강글 소령의 병력은 마을을 지키기에도 매우

벅찼으며 협력관계인 레지스탕스들도

 

대부분의 병력이 임무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난

상태라서 숫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이었지.

 


 

그러나 계속된 크로포트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강글은 어쩔 수 없이 위기에 처한 이터 성의

포로들을 돕기로 결정했으며

 

때마침 뵈르길에서 13km 떨어진 쿠프스타인에

연합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부족한 화력과 병력을 연합군에게서 끌어오기 위해

강글 소령은 쿠프스타인으로 급히 전령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

 


 

다만, 강글이 쿠프스타인으로 전령을 보냈을 때는

이미 무장친위대가 이터 성을 향해 진격을

시작하고 있던 중이었지.

 


 

한편, 미 육군 제 12기갑사단 예하 제 23전차대대

정찰소대 소속인 M4 셔먼 전차 네대는 천천히

쿠프스타인으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백기를 꽂은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들에게 접근 중인 [폭스바겐 퀴벨바겐] 을

보고 잠시 당황해 하던 찰나에

 


 

차에서 내린 독일군 병사가 초조하게 지휘관을

찾고 있자 당시 전차소대의 소대장이었던

존 잭 리(John Jack Lee) 대위

 

대표로 독일군 병사와 대면해 그로부터 뵈르길에

있는 강글 소령과 그 부하들의 항복의사 및,

지원 요청을 동시에 받게 되었지.

 


 

전령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전해들은 리 대위는

이 사실을 대대 지휘부에게 알렸고 그 즉시

군단 지휘부까지 거쳐간 끝에

 

리 대위의 소대가 항복한 독일군과 협력하여

이터 성의 포로들을 신속히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고 해.

 


 

새로운 명령을 하달 받은 리 대위는 이터 성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후속으로 도착한

 

미 육군 제36사단 142 보병연대로부터 추가로

병력을 지원받은 후 드디어 이터 성으로

출발하게 되었어.

 


 

리 대위의 부대는 이터 성으로 가는 중간 길목에서

강글 소령의 무리와 만나 합류하게 되었고

 

인근에 있던 제 36사단 125연대에게서 추가로

전차 5대와 1개 중대를 지원받아 막강한

전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한껏 전력을 갖춘 리 대위의 구출부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하게된 낡고 오래된

가교 하나 때문에 쪼그라 들고 말았어.

 

당시, 이터 성으로 갈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구출부대가 만나게된 이 가교를 지나가는

방법 뿐이었거든

 


 

그런데 문제는 가교가 워낙 파손이 심하고 오래된

상태라 많은 병력과 전차들의 하중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던 거야.

 

그리고 길을 우회해서 가버리면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입장이 이었던 리 대위 측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온 보병과 탱크들을

대부분 돌려보내고 말았고

 


 

트럭 한대에 14명의 미군과 독일군 병사 10명,

이들을 엄호할 탱크 한대만이 구출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되었어.

 

전력이 엄청나게 축소되어버린 구출부대는

가교를 건너는데 성공한 후 이터 성을

향해 계속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터 성 인근에 도달했을 즈음에 성 주변에

포위망을 형성중이던 무장친위대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지.

 

무장친위대 측은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기에 포위망를 형성하고

중화기를 배치하느라 분주한 상태였어.

 


 

강글 소령과 리 대위는 지금 무장친위대를

공격하는 것은 가망이 없을 것 같고

 

차라리 이터 성으로 들어가 지원부대가 올때까지

수성을 펼치는게 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지.

 


 

이리하여 구출부대는 탱크를 선두에 세우고 트럭에

전 인원이 탑승하여 이터 성까지 강행돌파

한다는 계획을 실행했고

 

후방에서 갑자기 미군 탱크와 병력을 가득 실은

트럭이 나타나자 혼비백산한 무장친위대는

공격도 못하고 길을 열어주어야 했어.

 


 

무장친위대의 포위망 한가운데를 돌파하고 간신히

이터 성으로 들어온 구출부대는 성을 방어하던

포로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구출부대의 숫자가 얼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고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 대위와 강글 소령은 성을

방어하기위해 가용 가능한 병력을 총동원해

성 곳곳에 배치 시켰어.

 

리 대위는 주요 구출목표였던 VIP 포로들에게

안전하게 숨어있기를 요구했으나

 

그들은 함께 무장친위대와 맞서 싸우기를 원했고

결국 이들에게도 총을 쥐어주어야 했지.


 

 

5월 5일.

 


 

이른 아침부터 무방친위대는 88mm 대공포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어.

 

이터 성은 정문에 배치한 M4 셔먼 전차의 주포와 

기관총의 화력을 중심으로필사적인 방어를

시작했지.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88mm 대공포에 의해

정문에 배치된 전차가 격파되고 말았고

승무원들이 부상을 입고 말았어.

 

그러자 위기를 느낀 리 대위는 다행히 망가지지

않은 전차 내 통신장비를 이용하여

 

쿠프스타인에 주둔해 있을 142연대에게

긴급지원요청을 하기 시작 했으나

 

그 직후 전차는 88mm 로부터 한 방을 더 맞아서

모든 장비가 무력화 되어 버리고 말았지.

 


 

그렇지만 다행히도 142연대 측에서는 리 대위의

지원요청을 접수할 수 있었고 즉시 전 병력을

이터 성으로 투입시키게 되었다고 해.

 

PM 12:00

 


 

정오가 되는 동안 양측은 필사적으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어.

 

하지만 이터 성의 방어군은 서서히 탄약이 떨어져

가고 있는 상태였고 무장친위대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들어오고 있었지.

 


 

한 편, 리 대위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아 출동한

142연대는 이터 성 근처에 도착했지만

 

이터 성의 방어군과 교전 중인 무장친위대를

찾지 못해 난감해 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이터 성의 리 대위도 지원병력을 발견하였으나

통신장비가 모두 망가져 그들에게 적의

위치를 알리지 못하고 있었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프랑스 스포츠 행정청장이자 이터 성의 담벼락을 

무려 세번이나 넘어서 탈옥을 시도한 전적이

있었던 장 보로트라 였다고 해.

 

image.png.jpg

자신이 보호해야할 VIP 포로가 자진해서 포화를

뚫고 142연대를 적에게 유도하겠다고하자

잠시 망설였던 리 대위였지만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 보로트라의 제안을 수락했지.

 


 

이리하여 이터성 방어군이 일제사격으로 시선을

끄는 틈을 타 장 보로트라는 담벼락을 넘어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성공했고

 

적의 포화 속을 헤쳐나간 끝에 길을 헤매던 142연대를

찾아 그들을 무장친위대의 후방으로 안내했어.


 

PM 04:00

 


 

오후 4시 쯤,  142연대는 마침내 이터 성을 공격 중이던

무장친위대를 발견했고 그들의 후방을 공격하여

전황을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해.

 

무장친위대는 갑자스럽게 뒤에서 공격을 받자

별다른 저항도 없이 도망치거나 항복하여

전투는  순식간에 종료되고 말았지.

 


 

이날 미군은 100여명의 이르는 무장친위대를 포로로

잡을 수 있었으며 이터 성 측은 강력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5명의 부상자와 1명의 전사자라는 엄청나게

경미한 피해만을 입은 상태였는데

 


 

이터 성에서 발생한 유일한 전사자는 다름아닌

요제프 강글 소령이었어.

 


 

그는 이미 두 곳의 총상을 입은 상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고

 

이터 성 방어에 참여했다가 총탄이 팔을 스치는 부상을

입은 폴 레노 프랑스 총리를 돕고자 이동하던 도중,

 


 

무장친위대 저격수에게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글 소령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폴 레노 총리의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고 해.

 


 

뒤늦게 그의 전사 사실을 알게 된 리 대위를 포함한

전투 참가자들은 그의 용맹한 행동을 기리며

애도를 해주었지.

 

 

 

1945년 5월 5일.

 

 

 

 

 


 

2차세계대전 유럽전선 최후의 전투로 기록된 이터 성

전투를 끝으로 성에 수용되었던 포로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 고위층으로 구성된 VIP 포로들도 프랑스로

출발하여 5월 10일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

 


 

이 전투의 공적으로  리 대위는 수훈 십자상을 수여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그를 도와 함께 이터 성을 지켜냈던

미군과 독일군 병사들도 훈장을 받게 되었지.

 


 

그리고 이터 성의 포로들을 구하기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싸우다 명예롭게 전사하게 된 독일 국방군 소속의

요제프 강글 소령

 

오스트리아의 영웅으로 추대되어 뵈르길 마을의 시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지어지게 되었다고 해.

 


 

그리고 패전국 장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글의

장례식에는 많은 연합국 인사들과 시민들이 찾아와

넋을 기려주었기에

 

그의 희생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생각해.




 

   

 

이터성 전투가 종료된지 이틀 후인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을 상대로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며 2차 대전은 마침내 종식 되었다.

 

          





 

 

 

                  이터 성 전투는 2차세계대전 기간동안 미군과      

                         독일군이 함께 연합하여 전투를 치룬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로써 역사에 기록 되었다.

 

 



 

 

 

 

 

 

 

 


 

                   "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한 모든 영웅들을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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