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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미국 남북전쟁(1)

울프징어 울프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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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px-Thure_de_Thulstrup_-_L._Prang_and_Co._-_Battle_of_Gettysburg_-_Restoration_by_Adam_Cuerden.jpg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1776년 독립전쟁부터 2020년 코로나 팬데믹까지, 미국이 치러온 모든 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 바로 남북전쟁이다. 최소 61만 8천 2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처절한 전쟁이었다.

 

하나의 연방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아니면 남부 주들이 거느린 4백만 명의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산업화된 북부가 나라를 이끌지, 농경 중심인 남부가 나라를 이끌지를 정하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이 모든 이유 때문에 1861년의 미국은 내전에 돌입했고 4년 간 온 나라가 전쟁에 시달렸다. 2천 4백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가 전미에서 벌어졌다.

 

북부의 승리로 미국은 유지되었으나, 인종 차별과 비통한 상처는 마지막 총성이 울린 지 15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전쟁이 미국 역사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대사건으로, 미국이 주 연합체에서 국가로 재탄생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연방을 구하라"

 

Abraham_Lincoln_seated,_Feb_9,_1864.jpg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남북전쟁이 발발한 계기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1860년 11월의 대통령 선거였다. 링컨은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공화당원이었고, 이는 남부 주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렀다. 몇십 년에 걸쳐 남부 주들은 노예 제도의 도덕성과 합법성을 놓고 북부 주들과 일종의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남북 전쟁이 시작될 무렵, 남부에는 노예가 400만 명 정도 있었는데, 이들은 남부 경제의 핵심 산업인 면화와 담배 작물 생산에 필수적인 존재였다.

 

새로운 주가 연방에 편입될 때마다 남부는 노예 소유를 허락하는 주이기를 바랐고, 북부는 노예가 없는 주이기를 바랐다. 인구가 많고 산업화한 북부 주들은 의원 수가 인구에 비례하는 하원에서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남부는 북부가 노예제 폐지에 더 힘을 얻을 것을 걱정했고, 그래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 연방 상원에서는 노예제를 찬성하는 새 의원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남부의 희망이 무너졌다. 링컨은 선거 유세 기간 내내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의사를 명백히 표했기 때문이다.

 

CSA_states_evolution.gif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의장 각하, 나는 미시시피 주의 주민들이 모여 내린 엄숙한 결단에 의거해, 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의회에 공표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I rise, Mr. President, for the purpose of announcing to the Senate that I have satisfactory evidence that the State of Mississippi, by a solemn ordinance of her people in convention assembled, has declared her separation from the United States."

- 제퍼슨 데이비스, 1861년 1월 21일 미국 상원

 

이후 몇 달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러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는 연방에 잔류),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의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미연합국을 창설했다. 연방의 분열이 현실화되는데도 뷰캐넌 대통령 때문에 링컨 당선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브레킨리지 부통령은 사임하고 남부의 전쟁부 장관이 되었다. 이들 11개 주는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로버트 E. 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남북전쟁의 첫 번째 포성은 1861년 4월 12일에 울렸다. 남군의 박격포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있는 북군 요새 포트 섬터를 향해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식량과 탄약이 부족했던 섬터 요새는 며칠 만에 항복했으며 남부와 북부는 4년 간의 처절한 전쟁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북부가 우위에 선 것처럼 보였다. 22개 북부 주와 11개 남부 주의 대결이었다. 북부의 인구는 약 2천 2백만 명으로 노예 4백만 명까지 포함한 남부의 9백만 명보다 훨씬 많았고, 중공업도 더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북부에만 유리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군의 정규 장교, 특히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던 웨스트포인트 졸업생 대부분이 남부 편에 섰기에 북군의 장군들은 정치인들이 지명한 인물들 뿐이었다. 또 남부에는 일찍부터 징병제가 있었지만, 북부는 전쟁 첫 2년 동안 자원병에만 의존했다.

 

1280px-The_Monitor_and_Merrimac.jpg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전쟁 초반, 링컨은 차풀테펙의 영웅 윈필드 스콧을 연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남부를 고사시키기 위한 '아나콘다 계획'을 실행했다. 연방 해군은 남부의 항구들을 즉시 봉쇄했고, 북군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가 남부를 양단한 뒤 남부의 수도인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를 점령하려 했다.

 

하지만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전쟁 초반부터 동부 전선에서 승승장구했다. 1861년 7월, 버지니아에서 벌어진 불 런 전투(제1차 매너서스 전투)에서 남군이 북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서부 전선에서는 1862년 초 율리시스 S. 그랜트라는 한미한 장군이 테네시 강의 요새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널슨을 점령하여 남군의 입지를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1280px-Lincoln_and_generals_at_Antietam.jpg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1862년 봄, 링컨이 창설한 포토맥군*의 사령관 조지 매클레런은 리치먼드를 점령하기 위해 버지니아 반도로 진군했다. 하지만 진군 속도가 너무 느렸던 데다 섀넌도어 골짜기에서 토마스 '스톤월' 잭슨의 작전에 말려 발목을 잡혔으며, 이어진 7일 전투에서 남군에 대패를 당한 후 워싱턴으로 퇴각했다. 반면 그랜트는 격렬했던 테네시 전역의 샤일로 전투에서 남군과 막상막하의 성과를 보여 주었다.

 

이 시점에서 양측은 이번 전쟁이 그전까지 있었던 다른 어떤 전쟁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battle-of-antietam-hero.jpg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북군이 그나마 희망을 걸 만한 일은 데이비드 패러것 제독이 봄에 뉴올리언스를 점령한 것과 9월 앤티텀 전투(샤프스버그 전투)에서 리의 북부 진격을 막아 냈다는 점뿐이었다. 북군은 앤티텀 전투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여 리의 북진을 막았으나, 양측이 2만 2천 명 이상의 생명을 잃었다. 하루 3,600명이 사망한 1862년 9월 17일은 코로나19가 4,406명의 목숨을 앗아간 2021년 1월 12일 이전까지 미국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두 번째로 많은 사망자가 나온 날이었다.

 

앤티텀 전투에서 승리한 매클레런은 승리를 이어가지 못했고, 링컨은 매클레런을 해임했다. 다음 1년 동안 링컨은 리를 이길 만한 인물을 찾느라 포토맥군 사령관을 다섯 번이나 교체해야 했다. 1862년 12월 말에는 앰브로즈 번사이드가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 남군에 완패했고, 후임 조셉 후커 역시 1863년 5월 챈슬러즈빌에서 리에게 패했다. '스톤월' 잭슨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링컨은 조지 고든 미드 장군을 새로운 포토맥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Lincolnatgettysburg.jpg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에이브러햄 링컨,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봉헌식

 

7월, 북군은 마침내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의 평원에서 리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이 서부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은 미시시피까지 남하해 빅스버그 요새를 점령했다. 이어서 테네시주 채터누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북군이 남군을 격파하자 남부는 수세에 물리기 시작했다. 전환점을 만들어낸 링컨은 그랜트를 연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늦게나마 징병제를 시행한 덕에 북군의 병력은 대폭 증가했고, 대규모 산업 시설은 끊임없이 탄약과 물자를 공급했다. 1863년 1월 1일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으로 남부의 사기는 저하되어 갔고, 인력 부족과 북부의 봉쇄가 심화되며 날로 약해졌다.

 

그랜트는 이런 남부를 상대로 치열한 소모전을 벌였다. 그는 버지니아로 진격하며 오버랜드 전역에서 리와 맞붙었고, 와일더니스 전투, 스폿실베이니아 코트하우스 전투, 콜드 하버 전투에서 승리한 뒤 6월 드디어 리치먼드 부근의 피터즈버그를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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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부 서부군은 철도 종착지이자 중요한 보급 기지였던 조지아주 애틀랜타를 공격하기 위해 서부군 총사령관으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을 파견했다. 셔먼은 9월에 도시를 점령한 뒤 서배너까지 남부를 가로질러 '죽음의 행군'을 감행했다. 485km 거리를 진군한 북군은 96km 폭으로 조지아를 초토화하며 죽음의 흔적을 남겼다.

 

1865년 3월, 리의 부대가 피터즈버그에서 패배하고 곧이어 리치먼드가 점령당했다. 리는 버지니아주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했다. 마지막 남군 대부대를 이끈 조셉 존스도 4월 18일 항복했다.

 

1024px-Lincoln_assassination_slide_c1900_-_Restoration.jpg 연방을 구하라 - 미국 남북전쟁(1)
 

하지만 4일 전 링컨은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남부 선동가 존 W. 부스에게 저격당해 숨진 뒤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꼭 4년 2일만이었다.

 

링컨이 떠난 자리에는 전쟁에 갈가리 찢긴 위태로운 나라가 남았다.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비도덕적인 보복 행위와 지난한 군정으로 점철된 재건기를 거치며 남부는 연방에 다시 합류해 갔다. 전쟁의 상처, 특히 인종 차별과 남부인이 미국에 느끼는 '이질감'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포토맥군(Army of Potomac)은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하기 위해 1861년에 창설된 부대로 북부의 주력 부대를 병합해 전쟁 초기에는 가장 규모가 컸다. 동부 전선에서 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로 북상하는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전쟁 직후인 1865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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